“퇴직 3년 전이면… 아직 여유 있지 않아?”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슬슬 불편해지는 시기죠. 회사 이름 뒤에 숨어 있던 명함이 사라지면, ‘나’라는 사람의 진짜 자산이 뭐였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은 그 막연한 불안을 조금 구체적인 작업으로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이름하여 ‘커리어 자산 인벤토리’ – 사무직의 인생 2막을 준비하는 가장 현실적인 리스트 만들기예요.

지금까지 해 온 일을 ‘자산’이라는 언어로 바꿔보는 시간
사무직 일을 설명할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회사에서 이것저것 하는 거죠. 보고서 쓰고, 회의 잡고, 일정 관리하고…” 문제는 이 표현으로는 인생 2막에서 쓸 만한 ‘자기 설명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퇴직 후에 누군가가 “그 동안 어떤 일 하셨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냥 사무직이었어요”라고 대답하면 상대는 무엇을 맡겨야 할지, 어디까지 기대해도 될지 전혀 감을 못 잡습니다. 마치 식당에서 “그냥 음식 만들 줄 알아요”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해요. 한식인지 양식인지, 메인 요리인지 디저트인지 알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커리어 자산 인벤토리입니다. 멋진 표현 같지만, 실제로는 엑셀 한 장으로 시작할 수 있는 “나의 경력 자산 목록”이에요. RPG 게임에서 인벤토리를 열어 아이템을 확인하듯, 내가 가진 커리어 아이템들을 하나씩 꺼내 보는 작업입니다.
자산은 크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경험 자산은 어떤 환경에서 일해봤는지를 말하고, 기술 자산은 손으로 직접 할 줄 아는 스킬이에요. 관계 자산은 함께 일해본 사람들과의 신뢰 네트워크, 성과 자산은 숫자로 증명 가능한 결과물, 그리고 가능성 자산은 아직 미완성이지만 키우면 쓸모가 커질 씨앗 같은 역량들입니다.
지금 당장 거창하게 다 채우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나는 사무직”이라는 한 줄을, 여러 개의 구체적인 자산으로 쪼개 보기 시작하는 거죠.
엑셀 한 장으로 시작하는 나만의 경력 지도
실제 작업은 정말 단순합니다. 엑셀이나 노션, 구글 스프레드시트 어느 것이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어떤 칸을 만들어 둘지입니다. 기본 구조는 이렇게 잡을 수 있습니다.
| 자산 유형 | 자산 이름 | 구체 설명 | 숫자 성과 | 2막 활용 아이디어 |
|---|---|---|---|---|
| 경험 자산 | 전사 교육 기획 및 운영 | 연 4회 전체 임직원 교육 과정 기획·운영, 외부 강사 섭외 | 연 4회, 만족도 평균 4.6/5 | 교육 컨설팅, 강의, 온보딩 프로그램 구축 |
| 기술 자산 | 엑셀 기반 데이터 분석 | 매출·비용 데이터를 엑셀로 정리, 피벗·그래프 활용 | 월간 보고서 1건, 연간 12건 | 소규모 기업 매출/비용 분석 대행 |
이 틀의 핵심 포인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산 이름”을 한 줄로 명확하게 요약하는 것. 둘째, 바로 옆 칸에 “2막에서의 활용 아이디어”를 붙여 두는 겁니다. 이렇게 해두면 나중에 “퇴직 후에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할 때, 막연한 상상 대신 구체적인 그림이 서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회사 생활 26년 차, 53세의 인사팀 차장 정민 씨가 있다고 해봅시다. 정민 씨의 자기 소개는 늘 이랬습니다. “그냥 인사팀에서 오래 일했어요. 채용이랑 평가, 교육 쪽 담당했고요.”
퇴직 3년을 앞두고 희망퇴직 소문이 돌자 불안해졌습니다. 막상 노트를 펴 놓고 적어보려니 딱히 쓸 말이 없는 것 같았죠. 그래서 커리어 자산 인벤토리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10년 이상 경력직 채용 진행, 승진 심사 실무, 교육 기획 및 강사 섭외” 이런 식으로 써내려갔어요. 언뜻 보면 특별할 게 없어 보이죠. 하지만 이걸 자산 인벤토리의 틀에 맞춰 조금만 더 해부해 보니 다른 그림이 나왔습니다.
“경력직 채용”이라는 한 줄은 실제로는 이런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어요. 연간 20~30명 규모의 채용 프로세스 운영 경험, 서류·면접 평가 기준 설계 능력, 현업 인터뷰어들을 위한 면접 스킬 교육 진행, 그리고 채용 실패 사례를 분석해서 개선안을 만드는 일까지. 이걸 표에 넣으니 자산 이름은 “경력직 채용 프로세스 설계 및 운영”이 됐고, 2막 활용 아이디어 칸에는 “중소기업 대상 채용 컨설팅, 면접관 교육 프로그램, 스타트업 채용 전략 워크숍” 같은 구체적인 서비스들이 떠올랐습니다.
정민 씨는 이 작업을 2~3주에 걸쳐 조금씩 진행했어요. 그 결과 본인이 “그냥 인사팀 차장”이라고 생각했던 정체성이 실은 “채용·평가·교육·조직 문화”를 다룰 줄 아는 경력 설계 전문가 후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게 바로 인벤토리의 힘입니다. 같은 경험을 다른 언어로 정리하면, 인생 2막에서 쓸 수 있는 포맷이 갑자기 늘어나요.

왜 하필 퇴직 3년 전이어야 할까
“퇴직 6개월 전에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막상 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3년 전에 시작해야 좋은 이유는 명확합니다.
먼저, 기억이 아직 선명할 때 기록할 수 있어요. 20년 전 프로젝트는 이미 디테일이 흐립니다. 반대로 최근 5~7년 사이의 일은 동료, 자료, 이메일 기록까지 비교적 쉽게 복원할 수 있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벤토리를 만들다 보면 “아, 이 부분은 더 깊게 파두면 인생 2막에서 크게 써먹을 수 있겠다”는 포인트가 보인다는 겁니다.
퇴직 3년 전이면 그 부분을 의식적으로 더 맡아 보거나 관련 프로젝트를 찾아볼 여유가 있어요. 예를 들어 정민 씨는 자신의 채용·교육 자산을 바탕으로 퇴직 전에 사내에서 소규모 특강을 먼저 해봤습니다. 주말이나 연차를 활용해서 외부 소규모 교육 파일럿도 돌려봤고요. 이런 실험이 있어야 퇴직 후 첫 1년이 “완전한 백지 상태”가 아니라 이미 검증된 상품을 조금 키워가는 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나를 다시 보게 만드는 점검 질문들
인벤토리를 채워가면서 스스로에게 던져볼 만한 질문들이 있어요. 이건 단순한 자기계발 질문이 아니라, 실제 서비스를 설계한다는 관점의 질문입니다.
내가 해 온 일 중에서 회사 이름을 떼도 그대로 쓸 수 있는 기술은 무엇일까요? 내가 하는 일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설명할 때, 돈을 주고라도 받고 싶게 만들 수 있는 요소는 뭘까요? 지금 회사 밖에서 똑같은 일을 하려면 나는 어떤 점에서 경쟁력이 있고, 어떤 점에서 약한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지금부터 3년 동안 나의 인벤토리에 어떤 자산을 한두 개 더 추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문장으로 써 내려가 보면, 어느 순간 인벤토리 표와 답변들이 합쳐져 하나의 “인생 2막 기획서 초안”이 됩니다.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첫걸음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칠 수 있어요. “알겠는데… 이걸 언제 다 하지?” 그래서 제안드리고 싶은 건 아주 작은 첫걸음입니다.
오늘 당장 엑셀이나 노션에 위에서 본 형태의 표를 하나 만들어 보세요. 자산 유형을 경험·기술·관계·성과·가능성으로만 먼저 적어두고, 그중에서 오늘은 딱 세 칸만 채워보는 겁니다. 지금 가장 자신 있는 업무 하나, 최근 3년 안에 했던 프로젝트 하나, 그리고 “나 아니면 힘들었을 것 같은” 업무 하나만요.
이 작업을 일주일에 두세번 만 반복해도 30개의 자산 항목이 쌓입니다. 세 달이 지나면 꽤 묵직한 개인 커리어 데이터베이스가 완성돼요.
퇴직 3년 전이라는 시점은 어디로 가야 할지 완전히 정해놓기에는 이르고, 아무 준비도 안 하기엔 조금 위험한 애매한 시기입니다. 그 애매함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까지의 시간을 “자산 목록”으로 바꾸는 거예요.
“나는 그냥 사무직이었다”에서 “나는 이런 자산을 가진 사람이다”로 문장을 바꾸는 순간, 인생 2막은 더 이상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조금씩 모양이 보이는 ‘기획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됩니다.
오늘 엑셀 한 장을 열어 두고, 자산 항목 세 칸만 채워 보세요. 그게 어쩌면 앞으로 10년, 20년을 버텨 줄 당신만의 커리어 인벤토리의 첫 줄이 될지도 모릅니다.